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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스님의 발자취
108산사 조회수:1109
2013-06-14 11:48:33
신라의 고승 혜초 스님이 열다섯 살에 고국을 떠나 열아홉 살에 천축국(인도)을 4년 간 순례하면서 달 깊은 밤에 하늘을 바라보고 구름과 바람을 벗 삼으며 조국인 계림(신라)에 대한 그리움을 시(詩)로 남겼다.

스님은 당시 남천축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곳은 적도지역으로 매우 더웠으며 인도의 승려로 대승불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대승 8종의 종조(宗祖)로 불린 용수보살과 인연이 깊은 성지였다. 스님은 작열하는 태양아래 차가운 사막에서 떠오르는 밤의 달을 보고 ‘왕오천축국전’에 이 시를 남겼던 것 같다. 누구나 그렇듯이 이국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고향과 조국은 늘 그리움으로 하얗게 남기 마련이리라. 스님 또한 그랬을 것이다.

오랜세월 목숨을 걸고 거친 자연과 낯선 사람들에 맞서며 나아가야 했던 고난의 길이었기에 고향 땅과 조국을 그리워하는 스님의 마음은 더욱 사무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혜초 스님은 구법여행을 통해 1,300여 년 전 문명과 사상 종교의 경계를 뛰어넘어 아랍과 이슬람 세계를 접한 첫 해동인(海東人)이자 한국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해동의 첫 구법여행기로 알려진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은 실로 오늘날의 인류문화를 대표하는 보물 중의 보물이리라.

혜초 스님은 매우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천축국으로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역풍이 불 때를 시점으로 해서 배를 타고 중국의 광주를 떠나 지금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 도착하여 1년 동안 열대기후에 적응하면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난 뒤 천축으로 떠났다.

그 후 남천축을 거쳐 페르시아ㆍ티베트ㆍ호밀ㆍ파미르ㆍ소록ㆍ구자ㆍ우기ㆍ돈황을 거쳐 마침내 장안으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스님이 당시 페르시아 지역까지 가서 아랍과 이슬람 문화를 체험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교통수단과 환경 등을 짐작해 볼 때 한마디로 스님의 구법순례는 죽음을 담보했음이 틀림없다.

혜초 스님이 천축으로 구법여행을 떠나게 된 동기는 밀교의 대가인 스승 금강지 스님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7세기 후반 중국은 밀교에 심취되어 있었다. 즉 밀교는 실천불교에 가까웠다. 스님이 구법여행을 떠난 계기도 이러한 밀교의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천축구법여행 후에도 금강지 삼장으로부터 법을 이어받고 경전을 번역했으며 밀교의 성지인 중국 오대산에서 밀교경전을 편찬하는데 온 힘을 쏟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지난 5월 2일 혜초 스님이 걸어 가셨던 그 길을 따라 룸비니에서 채화한 평화의 불을 가지고 비행기와 버스ㆍ배 등 문명의 힘에 의지해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지난 5월 27일부터 6월 5일까지 혜초 스님이 다녀왔던 길을 순례하고 돌아왔다. ‘평화의 불’ 이운일정에 맞추어 서두르다가 가보지 못했던 곳을 다시 순례하기 위해서였다.

티베트를 거쳐 해발 5,000여 미터의 산들이 즐비한 파미르 공원을 지났을 때는 고산병으로 몸이 많이 불편했다. 코피가 쏟아졌으며 몸은 지칠 대로 지쳤다. 10여 일 간에 지나지 않는 일정이었지만 몸과 마음은 참으로 힘들었다. 하물며 교통수단도 없이 봇짐을 메고 오직 두 발로 그 먼 길을 다녀왔던 옛 구법선사들의 고행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렇듯 수행은 오직 참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만행(萬行)을 통해 그 깨달음을 구하는 것도 하나의 수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난 7년 간 회원들과 ‘108산사순례’를 다니면서 우리의 순례가 불교신행문화와 이 사회에 진정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를 깊이 고민한 적이 있다. 불교는 실천의 종교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08산사순례기도란?】